《경주 崔富者 이야기》 경주는 신라의 고도 천년도읍지며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 문화유산 때문에 과거 수학여행 단골코스 경주시 교동 마을에는'최부자'로 이름난 최준(崔浚)의 집이 있는데 이 최부자집은 '12대(代)로 만석(萬石)꾼, 10진사(進士)를 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옛날 속담에 '부자재산 3대 못간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은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12대 300여년동안 만석지기를 유지해왔던 사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부자 그들은 누구인가? 최부자집의 파시조(派始祖)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이 되어 왜군을 물리친 최진립(崔震立)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仁祖)왕이 적들에게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6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감행하다 전신에 고슴도치처럼 적화살을 맞고 순국했다. 이듬해 인조왕은 순국한 최진립에게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에 추증한후, 무신(武臣)으로 드물게 용산서원에 모셨고, 정려각 신도비를 내렸다. 그후 거국적인 추모열기 뿐아니라 나라에서 최진립 장군 제사를 영원히 지내도록하는 불천위(不遷位)로 지정, 역대조선 국왕들이 4번이나 사액제문을 보냈고, 후손들은 수백년 동안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최부자는 어떻게 부자가 돼었을 까? 최부자 집에서는 양난(兩亂) 이후 피폐해진 조선 땅에 관개시설을 확보해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 도입으로 노동력이 크게 절감 되었고, 또한 성과급 제도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였다. 혁신적인 신농법의 도입과 지주와 소작인 모두가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상생의 원리! 이것이 경주 최부자의 부(富)의 비법이다. ◇진정한 최부자 가풍(家風)시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을 거치면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되고, 사회적 약자이던 하층민들은 극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살기위해 도적이 되어 밤낮 무리를 지어 햇불을 들고 부자집을 약탈하였다. 최부자집도 피할수 없었는데 3대 최국선 시절 100여명의 도적에게 피해를 본후, 이때부터 '상생'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조선시대 이런한 도적을 明火賊 이라고 하였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여라. 주택대지가 2,000평에 10,000여 평에 이르는 후원, 100여명의 노비를 두고 800석을 쌓을수 있는 곡식창고가 있으면서 중간 관리자를 없애고, 소작인들에게 노력한 만큼의 수익을 돌려주던 자율적 농사법을 실시, 흉년이 들면 과감히 곳간을 열어 굶는 사람이 없도록 나눠주고, 흉년에 돈과 곡식을 빌려가고 담보로 받아둔 차용서류를 모두 불태워서 받지 않았고, 당시 숙박시설이 없던시기에 여행객이나 손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성스럽게 독상(獨床)에 친절히 대접함으로서 하루에 100여명의 손님이 올때도 있었다. 이렇게 '상생'정책을 펴 최부자는12대 300여년에 걸쳐 만석지기를 유지할수있었다. (흉년에 국가적차원에서 실시하는 구휼제도를 직접실시 하였던것임, 요즘 재난긴급 지원 금과 동일) 뿐만아니라 매년 음력12월 27일은 최진립 장군의 제사를 지낸후, 이어서 최장군을 모시던 두명의 종(奴) '기별'과 ' 옥동' 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있다. 이두명의 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장군을 목숨을 걸고 보필했던 사람으로 반상(班常)의 차이가 분명하던 조선시대에 종에게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를 세워주고, 제사를 양반가문의 종손이 정성을 다해 지내준다는 건 놀라운 일이며, 이것이 바로 최부자집 후손들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이다. (현재 후손인 14대 종손 최재량 등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있음) ◇12대 최부자 최준(崔浚 1884~1970) 1910년 일제강점기에 영남지방의 독립운동가 들과 함께 대한광복회 주요인물로 활동하다 약1년간 투옥되기도하고, 위장기업으로 조선제일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을 보내면서 적자운영으로 일본경찰의 요시찰대상이었고, 동생 두명도 독립운동을 하던중, 일본경찰이 임시정부 재무의원인 둘째동생 최완(35세)을 형 최준을 잡기 위해 부친위독 가짜편지를 보내 국내유인 납치하여 심한 고문끝에 결국 순국하였다. 동생을 잃고, 회사는 거액의 부도가 나는 등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해방후 백범 김구가 직접 찾아와 감사인사와 함께 임시정부 자금조달 인명기록장을 보여줬다 고 한다. 최준은 부자가 나라를 위해 돈을 내놓는게 무슨 큰일인냐며, 공적이 알려지길 사양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20년이지난 1990년에 후손에게 국민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헌납 마지막 최부자집 12대 최준은 수많은 동지와 친동생이 독립운동 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것을 지켜본 결과, 해방된 조국을 튼튼히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한후, 미래의 후손을 기르는 육영사업에 쓰기로하고 만석꾼 전 재산을 대구대학 설립에 투자하고 초대 재단이사장 육영사업에 몰두하였으나 경영난에 봉착, 1964년에 호암 이병철에게 아무런 댓가없이 넘겨주고 자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후 대구대학이 청구대학와 합병,1967년 영남대학교로 그는 이제 일본경찰의 감시도 없고,전 재산도 사회에 희사했으니 도둑이 들 염려도 없다며,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을 남기고 197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전 재산(조상묘가있는 선산까지)과 살림집까지 사회에 희사한 선조와 만석꾼대신 연금 25만원의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후손. 이게 바로 경주 최부자의 참 모습이 아닐까요? [이시대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최부자집 가문의 6훈(訓) 1.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벼슬이 높으면 이권개입과 당쟁에 얽히게 된다는 뜻) 2. 재산은 만석이상 모으지 마라.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 )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는 뜻) 4.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 (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는 뜻)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검소, 절약하라는 뜻) 6. 사방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없게하라. (상부 상조하라는 뜻) -옮긴 글-야송-